As told to Laurel Schwulst, 2325 words.
Tags: Writing, Technology, Poetry, Business, Identity.
회사 소개
회사를 소개하는 회사의 CEO이자 편집자인 민구홍은 회사가 어떻게 건강한 일상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비롯해 ‘제품’이라는 말의 매력, 작명의 묘미, 관습을 따르는 ‘현대적’ 생활 등을 두루 이야기한다.먼저 회사를 소개해달라.
민구홍 매뉴팩처링(‘민구홍매뉴팩처링’으로 붙여쓰기 할 수 있다.)은 1인 기생 회사다. 여기서 ‘기생’은 다른 회사, 즉 내 근무지에 더부살이한다는 뜻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 운영 방식 중 하나다.
지금은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겸 출판사 워크룸(Workroom)에 기생한다. 이전 숙주는 대한민국의 주식회사 안그라픽스(Ahn Graphics)였고.
한편, 2015년 회사를 설립하면서 서른일곱 가지 목록을 통해 회사를 처음 소개했다. 열세 번째 시청각 문서로 발표한 「회사 소개」라는 글로, 회사의 첫 번째 제품이었다.
이는,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당시 회사의 주 업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회사라면 모름지기 무엇을 하기보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별 근거 없는 신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각 항목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비트코인으로 후원금을 모금하지 않습니다.”를 포함해 여전히 유효하다.
며칠 전 뉴욕을 방문했을 때 JFK 공항으로 돌아가는 전동차 안에서 여기에 몇 가지 항목을 더하기로 했다. 기존의 항목 중에 몇 가지를 수정할 필요도 생겼다. 그러면서 그간 명확하지 않았던 주 업무 하나를 결정해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무엇보다 회사를 소개하는 데 주력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구체성을 더하고 혼동을 피하고자 몇 구절을 더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무엇보다 *여러 방식으로* 회사, *즉 민구홍 매뉴팩처링 자체를* 소개하는 데 주력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무엇을 하는지) 회사를 소개할 수 있게 됐다고 보면 될까. 그런데 처음에는 완전히 반대(무엇을 하지 않는지)였다. 왜 그랬던 건가?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힌다면?
「회사 소개」는 일종의 선언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선언문들이 풍기는 엄정함과는 거리가 있다.
회사를 만들었으니 소개는 해야겠는데,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몰랐던 내게는 그만한 차선책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엇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가 아니라 규정하는 것 자체에 있다. 그리고 일단 운신의 폭을 넓히는 데는 무엇을 하지 않는 쪽을 규정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모든 이름에는 크고 작은 의미가 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회사 이름은 ‘민구홍’과 ‘매뉴팩처링’으로 구성된다. 전자는 다름 아닌 내 이름이다.
후자인 ‘매뉴팩처링’은 일반적으로 ‘원재료를 인력이나 기계력 등으로 가공해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산업’을 뜻하지만, 야구에서는 ‘도루나 진루타, 희생타 등 안타가 아닌 방법으로 득점하는 기술’을 가리키기도 한다. 나는 대부분의 일에서 이름을 짓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편이다. ‘매뉴팩처링’이라는 단어가 품은 기능주의와 기회주의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회사 이름에 드러내고 싶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쉽게 기뻐하고 쉽게 상처받기도 한다. 이는 내게 짐이 되곤 한다. 그런데 회사 뒤에 있으면, 생활과 일을 분리해 이런 것에 어느 정도 무신경해질 수 있다. 공연 예술가 앤디 코프먼(Andy Kaufman)은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투영할 요량으로 토니 클리프턴(Tony Clifton)을 창조해냈다. 위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내게 앤디의 토니인 셈이다.
회사, 즉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근무 환경은 어떤가? 특히 근무 시간이 궁금하다.
나는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여덟 시간 동안 워크룸에서 편집자로 일한다. 소정 근로 시간에는 피고용인으로서 즐겁고 열심히 임하고, 민구홍 매뉴팩처링 일은 짬짬이 또는 그 뒤에 두 시간 정도 하는 편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이 단순하고 느슨해 보이는, 또는 실제로 그런 이유다. 이따금 그 경계가 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숙주에 기생하는 기분은 어떤가? 그게 ‘현대적’이면서 ‘건강한’ 방식일까?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독립하는 대신 운영자의 근무지에 기생하는 방식을 취한 건 무엇보다 자본과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내가 조세법에 완전히 무지하고 집에서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점도 한몫했다.
그렇게 회사는 숙주에 노동력과 얼마간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대신 운영자의 월급으로 운영비를 충당하고 숙주의 동산과 부동산, 즉 작업 공간을 비롯해 컴퓨터, 책상, 와이파이, 커피 머신 등을 이용할 기회를 얻는다. 이런 방식은 회사를 취미 삼아, 즉 이윤 창출에 대한 고민 없이 순전히 개인의 행복을 위해 운영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해준다.
바람은 민구홍 매뉴팩처링과 숙주가 서로 필요한 부분을 제공하며, 함께 일하는 동료의 말을 인용하면 “어색함 없이 서로 착취하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피를 빨아먹는다’는 일반적 의미의 기생과 다른 점이다. 이때 필요한 양분은 고객의 사랑과 관심일 테고.
이상적인 생활 방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회사의 복지 환경과도 연결되는 질문이다.
요컨대 적절한 시간에 일어나 적절한 시간에 식사하고 적절한 시간에 운동하고 적절한 시간에 자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적절함을 확보하는 데 적절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 모자란 잠을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 서툰 자기최면 등으로 채우는 건 한 달에 한두 번이면 족하다. 생활의 나머지 요소는 체리 한 알과 비슷하다. 다른 체리들과 함께 바구니에 담길 수도, 무르고 터져서 악취와 끈적한 자국을 남길 수도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어느 정도 기여하는 건 분명하다. 생크림 케이크 꼭대기에서 말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제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제품에 집중하는 이유도 궁금하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제품은 일차적으로 회사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생산되는 부산물에 가깝다. 때로는 그 자체에서 또는 회사 밖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제품, 좀 더 정확히 ‘제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건 단지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회사’이기 때문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예술가나 그와 비슷한 무엇이라면, ‘제품’보다는 ‘작품’이나 ‘작업’이라는 말이 좀 더 자연스러울 테다. 내게 ‘제품’이라는 말은 일반적이고 중립적이라는 점에서 산뜻하고, 우리를 둘러싼 시장경제의 장단점(특히 단점)을 암시하는 점에서 을씨년스럽다.
어쩌면 반대로 ‘제품’이라는 말의 이런 복잡한 매력에 가까워지고자 ‘회사’를 만든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명분과 편의를 위한 것일 뿐 실제로는 해시태그들이 난삽하게 붙은 모습에 가깝다. 개중에는 제품보다는 회사 소개에 가까운 게 있는가 하면, 어떤 건 회사 소개이자 제품이다. 모든 걸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행과 열에 맞춰 한 셀당 한 항목씩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함께 일하는 다른 유능한 편집자들로 빙의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이 주로 웹 기술을 통해 이뤄지는 만큼 당신은 첨단 기술의 목적과 방향 또한 염두에 둬야 한다. 오늘날 수없이 쏟아지는 제품이 우리 삶을 얼마나 더 개선할 수 있을까?
2009년 겨울, 일본 도쿄를 방문한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는 아키하바라에서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선 쓸데없는 물건이 엄청나게 팔린다. 쇼핑을 하면 기분이 좋아질지 모르지만, 자신을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이슨(Dyson)의 최신 무선 청소기가 더 빠르고 깔끔하게 먼지를 빨아들일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질까? 1페타바이트 파일을 1초 만에 내려받는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까? 기술 발전은 우리가 행복을 유지하는 것과 별로 상관없을지 모른다. 물론 기술이 발전하면 당신과 내가 좀 더 쉽게 만날 수 있겠지만.
어쨌든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세상에 제품을 선보이는 데 책임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제품을 홍보할 때면 더더욱 그렇다. 「회사 소개」에서 밝혔듯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생화학 무기와 도청 장비, 무엇보다 샤워 커튼을 제작하지 않는 이유다.
회사 소개를 비롯한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과 당신이 숙주의 피고용인으로서 수행하는 ‘편집’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오늘날 ‘편집’은 제품처럼 도처에 있다. 아이폰의 기본 메일 애플리케이션만 실행해봐도 편집의 위상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나는 대학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공부했다. 소설 작법 시간에 선생님은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에 관해 “그저 거짓말을 잘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사실과 허구를 병존시켜야 한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꽤 우수한 학생이었던 것 같다.
요즘 나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각 제품에 관한 정보를 한 줄로 정리하고픈 야심을 품었다. (이 제품에는 일단 ‘보도 자료 표준 형식’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로 했다.) 『시카고 스타일 매뉴얼(Chicago Style Manual)』의 참고 문헌 인용법을 공부하는 중이다. 실용적이고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순수한 형태라는 점에서 참 아름답다. 언제 확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도 자료의 형식은 예컨대 이렇다.
제품명, “인용문/인용구”, 종류(복수인 경우 중점[·]으로 구분), 동업자(복수인 경우 중점[·]으로 구분), 제작/발표 연도.
이렇게 관습(또는 미풍양속)을 이용하는 건 내게 조형적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데 별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습은 이미 한 번 완성됐다는 점에서 아름다우면서 무엇보다 이용하기 편하다.) 웹을 통해 교육의 민주화가 이룩됐다지만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특히 내게 없는 능력을 지닌, 디자이너나 미술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즐거운 이유기도 하다.
예컨대 열쇠고리에 열쇠를 끼우면 본래 역할을 하지만, 약지를 끼우면 퍽 괴상해 보이는 반지가 된다. 그 위에 산세리프 서체로 조판한 ‘“Min Guhong Manufacturing” can be abbreviated as “Min Guhong Mfg.”’라는 문장이 인쇄된다면 어떨까? 여기에 ‘민구홍 매뉴팩처링 표기 지침(영어판)’이라는 제목이 붙는다면? 그리고 이걸 회사를 소개하는 ‘제품’으로 홍보하는 회사가 있다면?
타이포그래피 관습이나 문법 또한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관심사 중 하나다. 당신도 알다시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내가 숙주에서 편집자로서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타임스 뉴 로먼(Times New Roman) 속 모든 글자를 지운 「타임스 블랭크(Times Blank)」도 그런 맥락에 있다. 타임스 블랭크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전용 서체다.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를 들으며 사용하면 좋은… 여기서 테스트해볼 수 있다.
2018년 늦여름에 한 갤러리에서 회사를 소개하는 전시를 열었다. 회사라면 일반적으로 박람회나 키노트 같은 걸 여는데, 전시라는 방식이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았나?
그 전시는 회사를 소개하기 좋은 기회였다. 회사를 소개할 수만 있다면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갤러리에 소환되는 것도 별로 꺼리지 않는다. 전시에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들이 특정 규칙에 따라 구분 없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큐레이터 윤율리가 제안한 ‘레인보 셔벗(Rainbow Sherbet)’이라는 전시명은 참 잘 어울렸다. (“실용성, 우아함, 고약함이 각각의 노즐에서 분사되는 적당한 모양새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란 무척 어렵다.”) 나중에 알았는데 ‘레인보 셔벗’은 각종 마리화나를 혼합한 마약을 가리키는 은어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레인보 셔벗』 전시 전경(서울: 아카이브 봄, 2018). 사진: 나씽 스튜디오.
그중 몇몇 제품은 동업자들과 함께 제작했다. 동업은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중요한 제품 제작 방식이다. 이는 무엇보다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모든 걸 혼자, 그리고 능숙하게 해내는 건 쉽지 않고, 무엇보다 건강에 별로 좋지 않다. 이때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좀 더 회사처럼 작동했다. 회의를 거쳐 동업자를 선정해, 그들에게 발주서를 보냈고, 그들은 그에 따라 제품을 제작해 납품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 명함」, 2018. 명함. 강문식과 동업. 사진: 나씽 스튜디오.
「참고로 말씀드리면」, 2018. 단 채널 영상, 4분 14초. 로럴 슐스트(Laurel Schwulst)와 동업. 사진: 나씽 스튜디오.
그렇게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추억 속에는 명함, 회사 소개 영상, 김뉘연 씨가 쓴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 한 편 등이 놓이게 됐다.
또 하나의 수확이 있다면 ‘분홍이’를 컴퓨터 밖으로 끄집어냈다는 점이다.
「푹신」, 2017. 마스코트. 사진: 나씽 스튜디오. http://products.minguhongmfg.com/fuchsine
‘분홍이’는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본명은 자홍색을 만드는 염료명에서 따온 ‘푹신(Fuchsine)’이다.
푹신은 일종의 민구홍 매뉴팩처링 마스코트로, 아득히 먼 옛날 한 웹사이트에서 태어났다. HTML, CSS, 자바스크립트의 도움으로, 한 웹사이트의 머리(<head>)에 자리를 잡고, 하루에 한 번씩 몸집을 키우며 사용자가 클릭했을 때 혼잣말을 늘어놨다. 평양냉면을 좋아하고, 발렌시아가(Balenciaga)의 트리플 S(Triple S)를 신는 게 꿈이지만, 안타깝게도 아직은 다리와 발이 없는 상태다.
한편, 전시 오프닝 자리에서는 말립(Maalib)과 제작한 「범용 오프닝 디제잉」을 재생했다. 특히 모임 별의 조태상은 래퍼나 DJ 들이 온갖 행사 오프닝에 활발히 소환되는 오늘날, 어떤 성격의 행사에서든 이용할 수 있는 유용한 제품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텍스트를 주원료로 삼는 만큼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제품은 한국어만으로 이뤄지거나 한국어를 포함한다. 한국어에 관한 생각이 궁금하다.
그건 내가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것처럼 그야말로 우연이다. 한글도 마찬가지다. 한글을 따라다니는 ‘고도로 진화한 문자’ 같은 수식어는 언뜻 바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우연에 관해 말하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다.
내가 한국어를 좋아하는 건 단지 그게 (HTML, CSS, 자바스크립트처럼) 내가 곧잘 쓸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국어와 영어보다는 둘의 문자 체계, 즉 한글과 로마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나을 듯하다. 몇 년 전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구글 폰트 + 한국어 웹사이트를 만드는 데 참여한 적이 있다. 그 덕에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구글 폰트의 친구가 됐고. 한글은 닿자 열아홉 가지와 홀자 스물한 가지로 이뤄진다. 둘은 서로 조합돼 한 글자가 되고, 그 조합의 합은 물경 1만 7,388가지나 된다. 이런 특징은 한글 폰트를 제작할 때는 물론이고 특히 웹에서 사용할 때 영향을 미친다.
노토 산스(Noto Sans)를 기준으로 로마자 버전은 455킬로바이트지만, 한글 버전은 2.2메가바이트에 달한다. 작은 차이 같지만 브라우저가 폰트를 완전히 내려받는 단 몇 초 동안에는 페이지가 깜빡이며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다. 구글은 이 깜빡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심지어 머신 러닝 기술까지 도입했다.
나는 때로는 구글이 이 깜빡임을 완전히 없애는 것과 번역 기술 개선을 통해 언어 민주화를 이룩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먼저가 될지 궁금하다. 영어권 사용자에게는 도시 전설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런데 웹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일어난다.
다른 언어를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일, 즉 번역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행본을 번역한 적도 있는데, 자주 하는 편인가?
나 자신을 번역가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내가 경험해본 바로 번역 과정은 코딩과 비슷했다. 출발어(입력)와 도착어(출력), 그 사이에 번역(함수)이 있다는 점에서.
이는 재미있게도 내가 배운, 시를 쓰는 과정과도 비슷했다. 시적 대상(입력)과 시(출력), 그 사이에 시적 인식(함수)가 있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은 시적 연산 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 SFPC)에서의 경험을 떠올릴 때 더욱 분명해졌다. 내가 거기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주로 문학과 언어학을 배웠다고 말하는 걸 좋아하는 이유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ROM 카트리지」, 2019. 사진: BEM.
당신은, 역할은 다르지만, 인쇄 매체와 디지털 매체를 함께 다룬다. 좋아하는 책을 아우를 만한 특징이 있나? 있다면, 좋아하는 웹사이트와는 어떻게 다를까?
얼핏 평온하고 순진해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어딘가 불온해 보인다. (또는 그 반대.) 처음 세운 논리와 원칙을 끝까지 유지하며 동시에 부순다. 가볍다.
소비자로서 내용은 내게 유익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는 아무래도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다. 예컨대 간식으로 먹을 파이를 만드는 데 칼 세이건(Carl Sagan)의 『코스모스(Cosmos)』는 내가 구운 ‘우주적’ 파이의 맛까지 보장해주지 않으니까.
형식에 관해서는 할 말이 좀 더 있다.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는 완벽할수록 좋지만, 매크로 타이포그래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앞표지에 예쁜 꽃 사진 한 장만 넣어도 충분할 때가 있다. 중요한 건 그게 수선화인지, 양귀비인지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19. 비주얼 노벨. https://minguhongmfg.itch.io/welcome
한편, 나는 디자인 학교에서 넓게는 웹, 좁게는 인터랙티브 디자인을 가르치기도 한다. 학생들에게 웹사이트는 판형이 정해지지 않은, 부피와 무게가 없는 책이고, 책은 하이퍼링크와 스크롤바가 없는, 부피와 무게가 있는 웹사이트라고 말하곤 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웹이 과학자들의 논문 공유를 통한 공동 연구를 위해 시작된 것처럼 웹사이트의 형식은 책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언젠가 둘은 형식에서는 갈림길에서 헤어졌지만 목적지는 하나다. (둘이 가는 길은 테서랙트 안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이사를 할 때는 책이 훨씬 불리하다. 반대로 웹사이트는 ‘인쇄한(publish)’ 뒤에도 언제든 수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절제력과 결단력이 없으면 팔목터널증후군이 생길 가능성이 커지니 주의해야 한다.
회사를 소개하기 위해 지금까지 출시한 제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민구홍 매뉴팩처링 그 자체. 한 인간의 생활을 제법 둥글게 작동시키는 도구라는 점에서 말이다. 지금 당신과 마주 앉아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다 그 덕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아니라면 자본과 용기가 부족하다는 속내를 쉽게 털어놓지 못했을 테다. 그리고 행복한 척하며 미국이나 네덜란드를 떠돌았겠지.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롤모델로 삼는 회사가 있다면?
물론 있다. 하지만 (영업) 비밀이다. 특별할 건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알다시피 오늘날 비밀은 인터넷 밖에 있을 때 온전히 비밀이 된다. 구글이나 인터넷 아카이브 웨이백 머신(Internet Archive Wayback Machine) 서버 밖 말이다. 오늘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정말 나누고 싶은 건 어쩌면 거기, 그러니까 당신과 마주 앉은 이 테이블 사이, 바로 이 안개꽃 옆에 있을지 모른다.
좋아하는 과일 다섯 가지(100그램당 칼로리와 함께 큰 것부터 작은 것 순으로)
- 수박, 30칼로리
- 멜론, 34칼로리
- 복숭아, 39칼로리
- 무화과, 74칼로리
- 체리, 63칼로리